2008. 3. 18 풀무질 두 번째 모임.
참석인원 : 11명
텍스트 : 근대사회와 모더니티/ 이진경
본영 : (메모에 대한 부연설명 질문)
memo. ‘그렇게 신이 창조하셨다’는 자연의 섭리에 ‘왜’라는 물음이 제기 → 뉴튼 등 관찰, 법칙 이성의 발견 그런데 자연의 세계와 달리 어떤 역학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 인간의 역사영역 |
하나: 중세의 기독교관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신의 섭리’로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에 반문하는 ‘왜’라는 물음과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통적 세계관(종교)이 붕괴되고 종교의 교리를 과학이 대신하면서 근대사회로 이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연의 세계와 달리 법칙들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우리의 역사다. 첨언하자면 헤겔이나 맑스와 같은 대사상가들 또한 시대를 구분 짓고 역사를 예측했다는 점에서 예언적인(종교적인) 교리라고 비판받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들의 진정성은 계속 공부하며 검토해볼 일이지만)
정현 : 이 텍스트에서 ‘이성’을 비판하고만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성’은 인간 사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이성’이 비판받으면 ‘이성’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도구적 이성’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진정한 ‘이성’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오늘날 사회는 누구나 지켜야 될 것들이 대안 없이 무너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상의 원인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 책 서문의 주장대로 우리가 이성, 곧 합리성이라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져야 할 것들마저 '합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들 수 있겠고, 둘째, 오히려 이성이 너무나 경시되기 때문에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감정적/충동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당연한' 것들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해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경 : 이성과 감성이 모두 경시되었기 때문 아닐까. 해답은 너무나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찾아야 한다. 이성으로 감성을 돌보고 감성이 영감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나가야 한다.
하나 : 여기서 잠깐 제동을 걸자면 한국 사회의 특수한 프레임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은 참 재밌는 나라다. 근대화라고 하는 산업화를 급속히 이룩하고 경제부국을 향한다며 ‘이성’적인 가치를 꽤나 추구한다고 하지만 서구의 관점에서 미개한 동양적 가치들(물론 요즘은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해서 시각이 많이 바뀌어가지만), 이를테면 샤머니즘이나 풍수지리(예 : 대선후보의 조상 묘 자리 이장문제)와 같은 비이성적/비합리적인 부분이 도처에 공존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지금의 우리네 사회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근대 부르주아지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재벌들은 너무나 이성(계산가능성/통제가능성)에 매몰된 채 과신해왔고 근대 시민계급에 해당하는 우리들은 또 감각적인 것(대표적으로 대중매체)들에 함몰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계급의 분화가 이러한 사회상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또, 우리가 토론에서 전제해야 할 것은 지금 이 텍스트를 쓴 저자가 프랑스 이론가 들뢰즈의 언어를 많이 빌리고 있는데 이 들뢰즈라는 사람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들뢰즈라는 사람은 후기 구조주의자로 많이 분류되는데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 입장(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사고하고자 하고, 장(場)개념에 입각한 이론이고 공간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어느 정도 유지하되, 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사조다.
(vs 탈구조주의 : 구조주의를 벗어나려 함. 구조주의의 합리주의를 부정, 극단적인 반(反)구조주의 - 리오타르, 포스트모더니즘, 데리다 해체주의, 보드리야르 등)
그러므로 이 들뢰즈를 사유하고 있는 저자는 근대성(이성이 표어처럼 상징되는)을 무조건 비판하려고 드는 게 아니고 그 토양을 인정하고 오늘날에 여전히 높이 추구되는 근대적 가치들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토론에서 전제해야 할 내용이다
성진(사회자) : 아직 우리사회는 이성이 부족한 게 아닐까라는 정현이의 의견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시민 계급 형성 이후 계몽주의를 통해 지식인들 사이에서 토론․문자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그 것은 단연 이성의 역할이었다. 또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사람이 사람을 대우하는 형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전의 시대에서는(예 : 노예-군주/농노-영주) 계급의 구분에 따라 사람 간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근대 시민사회에서 예우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다. 이것은 이전의 ‘불합리함’을 ‘합리’로 변모시켜가는 과정이었다. 우리네는 ‘이성’이 극단 발전했지만 이러한 이성의 긍정성을 인정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성’은 사고하는 능력, 인간 간의 형식적 예절. 사회 규범. 뭐 그런 거니까.
희주 : 그런데 이성이 합리성과 꼭 같은 의미인가.
종민 : 저자가 제시한 ‘계산가능성/통제가능성’이라는 명제가 맞는 거라고 가정하면 ‘이성=합리성’이라는 명제 또한 맞게 된다.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텍스트에 쓰인 말 중 ‘사후복수’라는 인상 깊었다. 결국 우리가 이성의 문제로 재단했던 많은 것들의 결과가 환경과 같은 문제들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텍스트에서 예로 삼은 새만금간척사업이나 현재 활발한 이슈가 되고 있는 대운하 문제 등도 이성(계산가능성/통제가능성)의 문제로 수치화하고 가치화하는 문제 아닌가. 이것이 우리에게 돌아올 재앙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사회자 정리 발언 :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가장 기본이다. 개념 파악은 그 개념이 자기에게 익숙해지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모르고 어렵다고 조급해하기보다 꾸준히 하면 어느새 쉽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한다. 개념 파악 후엔 각자 자기 방법으로 스스로 개념을 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 낯선 개념들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사전적인 정의를 알아가는 것 뿐 아니라 같이 토론하면서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보태나가는 것이 서로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